나폴레옹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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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폴레옹 2세는 1811년 나폴레옹 1세와 마리 루이즈 여대공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로마 왕 칭호를 받았다. 1815년 워털루 전투 패배 후 나폴레옹 1세가 퇴위하면서 프랑스 황제로 즉위했으나, 15일 만에 부르봉 왕가의 루이 18세가 즉위하며 짧은 재위는 끝났다. 이후 오스트리아에서 라이히슈타트 공작으로 불리며 군사 훈련을 받았지만, 결핵으로 21세에 사망했다. 사후에는 나치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 유해가 파리로 이장되었고, 그의 삶은 희곡, 오페라, 영화 등의 소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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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2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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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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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프랑스 황제 (주장) 로마 왕 라이히슈타트 공작 |
전체 이름 | 나폴레옹 프랑수아 샤를 조제프 보나파르트 |
왕가 | 보나파르트 |
아버지 | 나폴레옹 1세 |
어머니 | 마리 루이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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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811년 3월 20일 |
출생지 | 튈르리 궁전, 파리, 제1 프랑스 제국 |
사망일 | 1832년 7월 22일 |
사망지 | 쇤브룬 궁전, 빈, 오스트리아 제국 |
매장지 | 앵발리드, 나폴레옹의 무덤 |
종교 | 로마 가톨릭교회 |
프랑스 황제 (주장) | |
재위 기간 | 1815년 6월 22일 – 1815년 7월 7일 |
이전 통치자 | 나폴레옹 1세 |
이후 통치자 | 나폴레옹 3세 (1852년, 황제로 즉위) 루이 18세 (프랑스 왕으로 즉위) |
섭정 | 조제프 푸셰 |
섭정 유형 | 섭정 |
보나파르트 가문의 수장 | |
임기 | 1821년 5월 5일 – 1832년 7월 22일 |
이전 수장 | 나폴레옹 1세 |
이후 수장 | 조제프 보나파르트 |
2. 생애
나폴레옹 1세와 오스트리아의 여대공 마리 루이즈 사이에서 태어난 유일한 적자이다. 태어나자마자 제국의 후계자에게 주어지는 전통적인 칭호인 '''로마왕''' 작위를 받았다. 아버지 나폴레옹 1세의 몰락으로 인해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오스트리아로 망명하여 외할아버지인 프란츠 1세 황제의 보호 아래 성장했다.
1814년과 1815년 아버지의 퇴위로 두 차례 명목상 프랑스 황제(나폴레옹 2세)가 되었으나, 실질적인 통치는 하지 못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프랑스식 이름 대신 독일식 이름인 '프란츠'(Franzde)로 불렸으며, 1818년 외할아버지로부터 '''라이히슈타트 공작'''(Herzog von Reichstadtde) 칭호를 받았다.
어린 시절부터 군인의 길을 동경하여 오스트리아군에 입대했으나, 그의 존재 자체가 가진 정치적 함의 때문에 메테르니히 등 오스트리아 정치 세력의 감시와 제약을 받았다. 아버지 나폴레옹 1세에 대한 강한 관심을 보이며 군인으로서 성장하고자 노력했지만, 건강이 악화되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1832년 빈의 쇤브룬 궁전에서 결핵으로 21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2. 1. 탄생과 배경
나폴레옹 1세는 정실 부인이었던 조제핀 황후와의 사이에서 적자를 얻지 못하자, 1810년 그녀와 사실상 이혼하고 오스트리아의 여대공 마리 루이즈와 재혼했다. 이는 바그람 전투에서 프랑스가 승리한 것을 배경으로 성사된 정략 결혼이었으나, 나폴레옹 1세는 선량하고 품위 있는 새 황후를 아꼈고, 마리 루이즈 역시 처음에는 나폴레옹을 잔혹한 인물로 상상했지만 점차 그에게 애정을 느끼게 되었다. 두 사람은 1810년 3월 11일 빈의 아우구스티나 교회에서 대리 결혼을 하고, 3월 27일 콩피에뉴에서 처음 만났으며, 4월 1일과 4월 2일에 각각 법률혼과 종교혼 예식을 올렸다.결혼 3개월 만인 그 해 7월 2일, 마리 루이즈의 임신이 확인되자 나폴레옹 1세는 매우 기뻐했다. 1811년 3월 20일, 파리의 튈르리 궁전에서 황태자가 태어났다. 출산 과정은 난산이었으며, 한때 아이가 위험한 상태에 놓이자 나폴레옹은 주저 없이 산모인 황후를 우선 구할 것을 지시했다. 태어난 직후에는 사산으로 여겨졌으나, 아이의 양육을 맡게 될 몽테스키우 백작 부인이 아기를 부드럽게 마사지하자 울음을 터뜨렸다. 출생 시 체중은 4500g, 신장은 56cm였다.
황태자의 프랑스어 이름은 '''나폴레옹 프랑수아 샤를 조제프'''(Napoléon François Charles Joseph프랑스어)였고, 독일어로는 '''나폴레옹 프란츠 카를 요제프'''(Napoleon Franz Karl Josephde)였다. 나폴레옹 1세는 아들이 태어나기를 간절히 바랐으며, 태어나자마자 제국의 후계자에게 주어지는 전통적인 칭호인 '''로마왕''' 작위를 수여했다.

태어난 당일 조제프 페쉬 추기경에 의해 프랑스 전통에 따라 간단한 세례식(ondoiement프랑스어)을 받았고[1], 1811년 6월 9일에는 프랑스의 루이, 그랑 도팽의 세례식을 본떠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성대한 세례식이 거행되었다[1]. 당시 프랑스 주재 오스트리아 대사였던 슈바르첸베르크 공작은 이 세례식에 대해 "세례식은 아름답고 인상적이었다. 황제가 고귀한 어머니의 품에서 아이를 받아 두 번 들어올려 대중에게 공개하는 장면에 큰 박수가 쏟아졌다. 군주의 모습과 얼굴에서 그는 이 엄숙한 순간에 큰 만족감을 느끼는 것을 볼 수 있었다."라고 기록했다.[1]
황태자의 양육은 1810년 10월 22일에 미리 임명된 몽테스키우 백작 부인이 맡았다. 그녀는 프랑수아 미셸 르 텔리에, 루부아 후작의 후손으로, 애정과 지성을 겸비한 인물이었으며, 어린 황태자에게 종교, 철학, 군사 지식의 기초를 다져주기 위해 많은 책을 모았다[1]. 나폴레옹 1세는 후계자인 아들을 매우 아꼈으며, 황태자가 처음으로 한 말도 "아빠(Papa프랑스어)"였다고 전해진다.
1813년, 나폴레옹 1세는 마리 루이즈를 섭정으로, 황태자를 로마왕으로 공식 대관하려 했으나, 당시 프랑스와 적대 관계에 있던 여러 국가의 압력으로 교황이 참석하지 못하게 되면서 계획은 무산되었다. 그러나 계속된 전쟁으로 프랑스의 입지는 점차 좁아졌고, 결국 1814년 4월 8일 나폴레옹 1세가 퇴위하고 엘바섬으로 유배되면서 어린 황태자의 운명도 바뀌게 된다. 훗날 오스트리아 궁정에서 양육되며 프랑스 색을 지우기 위해 '라이히슈타트 공작'(Herzog von Reichstadtde)이라는 칭호를 받게 된다.
2. 2. 프랑스에서의 짧은 통치
나폴레옹 1세의 유일한 적자로서, 나폴레옹 샤를(나폴레옹 2세)은 헌법상 황태자이자 상속자였으며, 아버지로부터 로마 왕 칭호를 받았다. 1814년 프랑스 제1 제국이 위기에 처하자, 나폴레옹 1세는 1월 24일 아내 마리아 루이사와 아들을 마지막으로 보았다.[2] 6일 전투와 파리 전투 이후인 4월 4일, 나폴레옹 1세는 세 살 된 아들을 위해 퇴위했고, 이에 따라 나폴레옹 샤를은 나폴레옹 2세라는 재위 명칭으로 명목상 프랑스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불과 이틀 뒤인 4월 6일, 나폴레옹 1세는 자신의 프랑스 왕위 계승권뿐만 아니라 자손의 권리까지 완전히 포기하며 퇴위했다. 1814년 퐁텐블로 조약은 나폴레옹 2세에게 파르마, 피아첸차, 과스탈라 공작 칭호를 사용할 권리를 부여했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 루이사는 파르마, 피아첸차, 과스탈라 공작부인으로 불리게 되었다.나폴레옹 1세가 열세에 놓이자, 마리아 루이사와 나폴레옹 2세 모자는 1814년 3월 29일 파리의 튈르리 궁전을 떠나 랑부예 성, 블루아 성 등으로 피신했다.[32][3] 4월 23일, 오스트리아 연대의 호위를 받으며 어머니와 아들은 랑부예를 떠나 프랑스를 영원히 떠나 오스트리아로 망명했다.[3]
1815년, 백일천하로 잠시 복위했던 나폴레옹 1세가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자, 6월 22일 다시 퇴위하면서 이번에도 아들 나폴레옹 2세에게 제위를 물려준다고 선언했다. 이로써 나폴레옹 2세는 다시 한번 명목상 프랑스 황제가 되었다. 나폴레옹 1세의 퇴위 다음 날, 다섯 명으로 구성된 임시 정부 위원회가 프랑스를 통치했으나[5], 위원회는 나폴레옹 2세를 황제로 공식 소환하거나 섭정을 임명하지 않았다. 결국 7월 7일 연합군이 파리에 입성하고 부르봉 왕가의 루이 18세를 왕으로 추대하면서[5], 나폴레옹 2세의 두 번째 재위는 약 15일 만에 실질적인 통치권을 행사하지 못한 채 막을 내렸다. 이 기간 동안 나폴레옹 2세는 어머니와 함께 오스트리아에 머물고 있었다.
2. 3. 오스트리아에서의 생활
1814년 아버지 나폴레옹 1세가 몰락하자, 어머니 마리 루이즈는 아버지인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1세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오히려 프란츠 1세와 메테르니히는 나폴레옹을 공격했다. 얼마 뒤 마리 루이즈와 어린 나폴레옹 2세는 연합군에 의해 오스트리아로 보내져 빈의 궁전에서 지내게 되었다.1814년 봄부터 오스트리아에서 살게 된 어린 나폴레옹은 그의 두 번째 이름인 프랑수아(François)의 독일식 표기인 "프란츠"(Franz)로 불리게 되었다. 그는 외할아버지 프란츠 1세의 보살핌 아래 오스트리아식 교육을 받았다. 그의 새로운 가정교사로는 메테르니히가 추천한 모리츠 폰 디트리히슈타인(Moritz von Dietrichstein)이 임명되었다.[49] 나폴레옹 2세는 "나는 프랑스인이다"라는 자각을 가지고 디트리히슈타인에게 저항하기도 했다.[50] 그는 독일어, 이탈리아어, 수학 등을 배웠다.
1816년 3월 7일, 어머니 마리 루이즈는 파르마 공국의 통치자로 임명되어 파르마로 떠나게 되었다.[51] 프란츠 1세는 나폴레옹 지지자들의 납치나 반나폴레옹파의 위협을 우려하여 나폴레옹 2세를 빈에 남겨두었다.[52] 나폴레옹 2세는 프랑스어로 어머니에게 편지를 쓰며 그리움을 표현했다.[51] 마리 루이즈는 아들을 위해 새로운 칭호를 얻고자 노력했고, 결국 1818년 8월 22일 외할아버지 프란츠 1세로부터 '''라이히슈타트 공작(Duke of Reichstadt)''' 칭호를 받았다.[64] 그는 독일어로 프란츠 1세에게 감사의 편지를 썼다.[55]

어머니 마리 루이즈는 1817년과 1819년에 나이페르크 백작과의 사이에서 비밀리에 아이들(알베르티네, 빌헬름 알브레히트)을 낳았고, 이로 인해 아들과의 만남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생겼다.[56][65] 나폴레옹 2세는 어머니와의 약속이 어겨질 때마다 크게 슬퍼했다.[57] 1821년 5월 5일, 아버지 나폴레옹 1세가 세인트헬레나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이 7월 13일 빈에 전해졌다. 가정교사 포레스티 대위로부터 아버지의 죽음을 전해 들은 그는 책상에 엎드려 통곡했으며[67], 빈 궁정에서 유일하게 상복을 입었다.[68] 어머니 마리 루이즈는 7월 24일 아들에게 위로의 편지를 보냈고[69], 나폴레옹 2세와 측근들은 이에 감동했다.[70] 그러나 마리 루이즈는 같은 해 8월 8일 나이페르크 백작과 비밀리에 귀천결혼했다.[71]
1829년 나이페르크 백작이 사망한 후, 마리 루이즈는 메테르니히의 조사에 응해 재혼과 자녀들의 존재를 공표했다.[86] 프란츠 1세로부터 이 사실을 직접 전해 들은 나폴레옹 2세는 큰 충격을 받았고[87], 특히 이복 동생들이 아버지 나폴레옹 1세가 살아있을 때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고 더욱 괴로워했다.[90] 하지만 그는 어머니의 힘든 처지를 이해하려 노력하며 이전보다 더 다정한 편지를 보냈다.[91] 그는 친구 안톤 폰 프로케쉬-오스텐에게 "만약 조제핀이 나의 어머니였다면, 아버지는 세인트헬레나에 묻히지 않았을 것이고, 나 역시 빈에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의 어머니는 친절하지만 약합니다. 그녀는 나의 아버지가 받을 자격이 있는 아내가 아니었습니다"라고 말하며 복잡한 심경을 드러내기도 했다.[7]
나폴레옹 2세는 외할아버지 프란츠 1세, 의붓 할머니인 황후 카롤리네 아우구스테, 고모 마리아 레오폴디네 등 오스트리아 황실 가족들에게 많은 귀여움을 받았다.[58] 1824년 숙부 프란츠 카를 대공과 결혼한 조피 대공비와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자주 교류했다.[75][77] 13세 무렵부터는 사교계에 데뷔하여 활발하고 품격 있는 모습으로 주목받았다.[76]

그는 아버지 나폴레옹 1세에게 강한 관심을 보였고[59], 1826년 이후 아버지에 관한 자료들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특히 에마뉘엘 드 라스 카즈의 『세인트헬레나의 나폴레옹 회고록』과 샤를-트리스탕 드 몽토롱 후작의 회고록에 몰두했다.[80] 그는 독일 역사나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에도 감명을 받았으며, 실러의 희곡 『돈 카를로스』의 시를 암송하기도 했다.[81]
190cm에 달하는 키와 잘생긴 외모로 성장한[92] 나폴레옹 2세의 주변에는 항상 정치적 이용이나 납치에 대한 우려가 끊이지 않았다.[92] 1826년 나폴레옹 지지자가 그의 마차에 삼색기와 프랑스 귀환을 요구하는 편지를 던진 사건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79]
2. 3. 1. 군사 경력


어린 시절부터 군사 교관들의 지도를 받으며 군인에 대한 열정을 키웠고, 아버지 나폴레옹의 축소판 제복을 입고 궁궐에서 훈련했다. 8세가 되자 교관들은 그가 군인의 길을 선택했음을 알게 되었다. 1820년 초등 교육을 마치고 군사 훈련을 시작했으며, 독일어, 이탈리아어, 수학을 배우고 고급 체력 훈련을 받았다. 그의 공식적인 군 경력은 12세 때인 1823년 오스트리아군 생도로 임명되면서 시작되었다. 교관들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지적이고 진지하며 집중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또한 그는 키가 매우 커서 17세가 되었을 때 키가 거의 약 1.83m까지 자랐다.
1828년, 나폴레옹 2세는 티롤 연대의 대위로 군대에 정식으로 입대하였다. 그러나 아버지 나폴레옹 1세와 같은 천재적인 군사 전략가는 아니었다는 평가가 있다.
그의 군 경력은 정치적인 이유로 많은 제약을 받았다. 그의 존재 자체가 프랑스로 귀환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어 유럽 군주국들에게 우려와 관심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오스트리아 제국 국무장관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는 그가 정치적 역할을 맡는 것을 철저히 막았으며, 오스트리아의 이익을 위해 프랑스와의 협상 카드로 이용하려 했다. 심지어 외할아버지 프란츠 황제는 그가 이탈리아에서 발생한 반란을 진압하는 군대에 합류하겠다는 요청을 허락하지 않았다.[6]
1830년 7월 혁명으로 프랑스에서 샤를 10세가 폐위되자, 나폴레옹 2세를 새로운 국왕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100], 오스트리아의 대공으로 여겨지는 시각이 많아 성사되지 못했다. 이후 벨기에 독립 혁명[101]과 폴란드의 11월 봉기[102]에서도 그의 이름이 거론되었으나, 메테르니히는 "라이히슈타트 공의 국왕으로 가는 문은 닫혀 있다"고 공언하며 이러한 움직임을 차단했다.[103]
나폴레옹 2세는 군인으로서 성장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라츠에서 만난 지구 사령관 알로이스 폰 마추켈리 백작에게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감격했고[95], 안톤 폰 프로케쉬-오스텐 소령과 교류하며 자신의 군사적 포부를 나누었다.[97] 그는 아버지와 같은 야전 사령관이나 오이겐 공자 같은 인물이 되기를 동경했다.[97] 1831년 1월에는 프로케쉬-오스텐의 소개로 프랑스의 오귀스트 마르몽 원수를 만나 약 2개월간 군사 강의를 듣기도 했다.[104][105][106] 이러한 경험을 통해 아버지 나폴레옹 1세를 더욱 가깝게 느끼게 되었다.[106]
그는 프로케쉬-오스텐 소령과 함께 자신이 처한 "새장 속의 새"와 같은 제약된 상황을 타개할 방안을 논의하기도 했으나, 건강 악화로 실현되지는 못했다.[107]
1831년 6월 14일, 헝가리 제60연대 대대장으로 임명되었다.[112] 이는 합스부르크 가문 대공들이 프라하에서 군 경력을 쌓는 관례와 달랐고 승진도 아니었지만[113], 그는 병사들과 함께 훈련할 수 있다는 사실에 크게 기뻐했다.[113] 계속되는 기침과 미열에도 불구하고[114] 이른 아침부터 훈련과 군무에 매진했고, 거처를 궁정에서 연대 병영으로 옮기기까지 했다.[115] 이러한 모습은 상관과 부하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115] 같은 해 여름 빈에 페스트가 유행하여 황제가 쇤브룬 궁전으로 피신하라고 명령했을 때도, 병영을 떠나기 싫어 한동안 따르지 않았다.[117]
그러나 그의 건강은 점차 악화되었다. 이른 아침부터 계속된 고된 훈련은 그의 건강을 더욱 해쳤다.[93] 결국 8월 건강 악화로 쇤브룬 궁전으로 옮겨 요양하게 되었다.[118] 9월 14일 잠시 대대에 복귀해[122] 27일 열병식에도 참가했으나, 목이 쉰 모습을 본 주치의의 건의로 프란츠 황제는 다시 쇤브룬 궁전에서의 요양을 명령했다.[123] 이는 사실상 그의 짧은 군 경력에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2. 3. 2. 질병과 죽음
1823년경 가정교사였던 모리츠 폰 디트리히슈타인은 나폴레옹 2세가 결핵을 앓고 있음을 언급하며 그의 건강 상태에 대한 우려를 나타냈다.[73] 이는 그의 짧은 생애 동안 건강 문제가 지속되었음을 시사한다.1831년 오스트리아군의 대대 지휘관으로 임명되었으나[112], 얼마 지나지 않아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그는 지속적인 기침과 미열에도 불구하고 군사 훈련과 임무에 열정적으로 참여했다.[114] 그러나 그의 건강은 점차 나빠져 1831년 8월에는 주치의 요한 밥티스트 말파티 폰 몬테레지오 박사의 지시로 쇤브룬 궁전에서 요양을 시작해야 했다.[118][119] 잠시 군무에 복귀하기도 했으나, 1832년 1월 혹한 속에서 열린 장례식 지휘 도중 쓰러져 다시 요양 생활에 들어갔다.[128]

당시 결핵은 치명적인 질병으로 여겨졌기에, 주치의들은 그의 정확한 병명을 알리는 것을 꺼렸고 보도 또한 통제되었다.[130] 1832년 봄, 그의 건강 상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5월에는 프란츠 1세 황제에 의해 대령으로 임명되었으나, 그는 힘없이 미소 지을 뿐이었다.[131] 그는 어머니 마리 루이즈를 보고 싶다는 뜻을 측근에게 전했다.[130] 그의 숙모이자 친구였던 조피 대공비는 그의 마지막을 예감하고, 그가 편안히 지낼 수 있도록 쇤브룬 궁전 내 아버지 나폴레옹 1세가 머물렀던 방을 마련해주었다.[132][134] 조피 대공비는 병상에 누운 그를 정성껏 간호했다.[111]
병세는 계속 악화되어 귀가 잘 들리지 않게 되었고[135], 6월 20일에는 성사를 받았으나 이는 오히려 그의 마음을 깊이 상하게 했다.[139] 6월 24일, 어머니 마리 루이즈가 빈에 도착했지만, 아들의 쇠약해진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다.[140] 7월 중순 이후에는 목소리조차 내기 어려울 정도로 상태가 위독해졌다.[141]

1832년 7월 21일 오후, 그의 상태가 급격히 악화되자 사제와 어머니 마리 루이즈가 급히 호출되었다.[143] 다음 날인 7월 22일 새벽 3시, 나폴레옹 2세는 빈의 쇤브룬 궁전에서 어머니와 측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21세의 젊은 나이로 결핵으로 사망했다.[8][144] 그는 자녀를 남기지 못했다.
3. 사후
모르 남작은 린츠로 급히 가서 프란츠 1세에게 서거를 보고했고, 황제는 눈물을 흘리며 손자의 죽음을 슬퍼했다.[145]
7월 24일, 시신은 아우구스티나 교회에 안치되었고, 다음날 25일에는 많은 일반 시민들이 참례했다.[146] 그리고 7월 27일, 제60연대의 장례 행렬에 의해 카푸친 납골당에 매장되었다.[146]
3. 1. 유해 이장
나폴레옹 2세 사후 100여 년이 지난 1940년 12월 15일, 그의 유해는 빈에서 파리의 앵발리드로 옮겨져 아버지 나폴레옹 1세 곁에 안장되었다.[9][10] 이는 나치 독일의 총통 아돌프 히틀러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히틀러는 젊은 시절부터 나폴레옹에 대해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당시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병합하고 프랑스를 점령하고 있었기에 개인적인 명령으로 유해 이장을 실행할 수 있었다. 나폴레옹 1세의 유해는 7월 왕정 시기인 1840년 12월에 프랑스로 돌아와 앵발리드에 안치된 상태였다.[11]

1969년 12월, 나폴레옹 2세의 유해는 앵발리드 돔 아래 지하의 나폴레옹 묘로 다시 옮겨졌다.
1940년 유해 대부분이 파리로 옮겨졌지만, 그의 심장과 내장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전통에 따라 빈에 남겨졌다. 심장은 ''헤르츠그루프트''(심장 납골당)의 항아리 42번에, 내장은 공작 납골당의 항아리 76번에 보관되어 있다.
3. 2. 유산
나폴레옹 1세와 2세 부자의 유해는 사후에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 한자리에 놓이게 되었다. 젊은 시절부터 나폴레옹에게 깊은 관심을 가졌던 히틀러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파리를 점령한 후, 합스부르크 왕가의 전용 묘지에 있던 나폴레옹 2세의 유해를 파리로 옮겨와 앵발리드에 있는 나폴레옹 1세의 무덤 옆에 이장시켰다.나폴레옹 2세는 생전에 프란츠 카를 폰 외스터라이히 대공의 아내이자 비텔스바흐 가문 출신의 바이에른 공주였던 조피 프레데리케 폰 바이에른 왕녀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지적이고 야심만만하며 의지가 강했던 조피 대공비는 남편인 오스트리아 대공 프란츠 카를과는 공통점이 거의 없었다고 전해진다. 이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 염문설이 돌았고, 1832년에 태어난 조피 대공비의 둘째 아들, 훗날 멕시코 황제가 되는 막시밀리아노 1세가 실제로는 나폴레옹 2세의 아들이라는 소문도 있었으나 확인된 바는 없다.
언론인 앙리 로슈포르는 나폴레옹 2세가 실제로 통치한 적이 없었기에 전쟁, 세금, 폭정 같은 폐단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점에서 프랑스 최고의 지도자라고 농담하기도 했다.[12]
나폴레옹 2세의 삶은 여러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연도 | 장르 | 작가/감독 | 작품명 |
---|---|---|---|
1900년 | 희곡 | 에드몽 로스탕 | 레글롱 (L'Aiglon) |
1920년대 | 오페레타 | 세르비아 작곡가 페타르 스토야노비치 | 나폴레옹 2세: 라이히슈타트 공작 (Napoleon II: Herzog von Reichstadt, 빈에서 초연) |
1931년 | 영화 | 빅토르 투르잔스키 | 레글롱 (프랑스어), 라이히슈타트 공작 (독일어) |
1937년 | 오페라 | 아르튀르 오네게르, 자크 이베르 | 레글롱 (L'Aiglon) |
190cm의 큰 키를 가진 미남으로 성장한 라이히슈타트 공 주변에는 항상 납치나 정치적 이용에 대한 우려가 끊이지 않았다.[92] 그는 이른 아침부터 군사 훈련에 매진했으나, 이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어 겨울 내내 기침에 시달렸다.[93]
1830년 6월, 라이히슈타트 공은 할아버지 프란츠 1세와 함께 그라츠에서 어머니 마리 루이즈와 재회했다. 이는 프란츠 1세가 며느리를 용서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94] 그라츠에서는 라이히슈타트 공을 보기 위해 모인 군중들이 "나폴레옹 만세"를 외치기도 했다.[93] 당시 그라츠 지구 사령관이었던 알로이스 폰 마추켈리 백작은 과거 자신이 나폴레옹 1세 휘하에서 복무하고 마렝고 전투에 참전했던 경험을 이야기해주었고, 라이히슈타트 공은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감격했다.[95]
같은 해 6월 22일, 라이히슈타트 공은 빈에서 마추켈리 백작을 초청하여 만찬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는 황후와 요한 대공도 배석했다.[96] 이때 마추켈리 백작을 수행한 부관 중 한 명이 34세의 안톤 폰 프로케쉬-오스텐 소령이었다.[96] 프로케쉬-오스텐은 전사(戰史) 연구가로 명성이 높은 젊은 장교였다.[96] 다음 날인 23일, 교육 담당이었던 디트리히슈타인이 프로케쉬-오스텐 소령을 라이히슈타트 공에게 다시 소개했다. 라이히슈타트 공은 소령이 이전에 나폴레옹 1세를 옹호하는 논고를 발표했던 것에 감사를 표하며, 아버지와 같은 야전 사령관이나 프랑스 출신으로 오스트리아에서 활약한 오이겐 공자에 대한 동경심을 드러냈다.[97] 프로케쉬-오스텐 소령은 라이히슈타트 공이 그리스 독립 전쟁 이후 아드리아노플 조약에 따라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그리스 왕국의 새로운 군주로 적합하다고 생각했다.[98] 라이히슈타트 공은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를 만나게 되어 기뻐했다.[99]
한편, 프랑스에서는 1830년 7월 27일부터 29일까지 7월 혁명이 일어나 부르봉 왕가가 다시 타도되었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 우파 세력 일부가 라이히슈타트 공을 프랑스 국왕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100] 또한 8월에 시작된 벨기에 독립 혁명 이후, 벨기에의 초대 국왕 후보로 라이히슈타트 공이 유력하게 거론되기도 했다.[101] 가을에는 폴란드에서 11월 봉기가 발생하자, 민중 사이에서 "나폴레옹 2세"를 옹립하자는 목소리가 나왔다.[102] 그러나 오스트리아 재상 메테르니히는 이러한 움직임을 경계하여 12월 26일 사교계에서 "라이히슈타트 공이 왕위에 오를 길은 닫혀 있다"고 공언했고, 이 발언이 퍼지면서 그를 옹립하려는 시도는 잠잠해졌다.[103]
1831년 1월 하순, 라이히슈타트 공은 오스트리아 주재 영국 대사관 파티에서 프로케쉬-오스텐 소령의 소개로 프랑스의 오귀스트 마르몽 원수와 만났다.[104] 이는 양측 모두에게 감격적인 만남이었으며, 라이히슈타트 공의 요청과 메테르니히의 승인 하에 마르몽 원수는 1월 28일부터 약 2개월간 라이히슈타트 공에게 강의를 진행했다. 이를 통해 라이히슈타트 공은 아버지 나폴레옹 1세에 대해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106]
이후 라이히슈타트 공은 프로케쉬-오스텐 소령과 함께 자신이 처한 "새장 속의 새"와 같은 제약된 상황을 타개할 방안을 논의했지만, 그의 병세가 악화되면서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107] 같은 해 3월, 메테르니히는 프로케쉬-오스텐 소령을 볼로냐 주재 교황청 대사로 임명했고, 라이히슈타트 공은 친구의 영전을 축하하며 작별을 아쉬워하는 편지를 썼다.[108]
3. 3. 조피 대공비와의 관계
나폴레옹 2세는 생전에 숙부인 프란츠 카를 폰 외스터라이히 대공의 아내였던 조피 대공비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1824년, 나폴레옹 2세의 숙부인 프란츠 카를 대공이 바이에른의 공주 조피와 결혼하면서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되었다.[75] 당시 13세였던 나폴레옹 2세는 활발하고 품격 있는 모습으로 오스트리아 사교계에서 주목받기 시작했으며[76], 무도회 등에서 당시 19세였던 젊은 숙모 조피 대공비와 춤을 출 기회가 많았다.[75]

아름답고 의지가 강했던 조피 대공비는 야심이 없고 평범한 성격의 남편 프란츠 카를 폰 외스터라이히 대공과 사이가 원만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반면, 나이가 어렸던 나폴레옹 2세와는 가까이 지내며 함께 외출하는 경우도 잦았다.[77]
두 사람의 이러한 친밀한 관계 때문에, 조피 대공비가 후에 멕시코 황제가 되는 막시밀리아노 1세를 임신했을 당시, 그 아이가 사실은 나폴레옹 2세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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